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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땀부란13

독립 인도네시아 꿈꾼 한국인 영화 감독(7) 독립 인도네시아 꿈꾼 한국인 영화 감독자카르타 쁘땀부란 공동 묘지 내 허영 무덤을 찾아서 허영은 일본의 패망 직전 인도네시아 독립을 지원하던 한국인 군속들의 목숨을 구해 줍니다. 이를 계기로 전후 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닥터 후융이란 이름으로 인도네시아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후 네덜란드에 맞선 인도네시아의 독립 투쟁을 그린 영화 '프리에다(Frieda)'를 제작해 국민 감독의 반열에 오릅니다. 그리고 영화 불모지나 다름없던 인도네시아 영화 산업의 초석을 쌓는데도 힘을 보탭니다. 물론 국군으로의 뒤늦은 개과천선(?)과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의 칭송이 군국주의 영화를 생산한 친일 전범의 오명을 씻어주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허영, 히나츠 에이타로, 닥터 후융 등 세 개의 이름으로 세 개의 인생을 살다 간 허영을.. 2017. 9. 21.
독립 인도네시아 꿈꾼 한국인 영화 감독(5) 독립 인도네시아 꿈꾼 한국인 영화 감독자카르타 쁘땀부란 공동 묘지 내 허영 무덤을 찾아서 2009년 여름에 출간돼 잔잔한 파장을 몰고 왔던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 이었다'는 책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징병으로 만주로 끌려갔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 시베리아에 억류됐던 한국인 일본 군인들의 아픔을 다룬 기록물입니다. 허영의 삶을 책의 제목에 대입해 보면 '나는 일본군 인도네시아군 국군 이었다' 쯤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들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대다수 시베리아 억류자들이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고난을 강요받았다면, 일제의 식민지 통치정책인 내선일체를 선전하는 영화를 제작한 허영은 자발적으로 친일 행위에 팔을 걷어붙였습니다.실제 친일 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라.. 2017. 9. 19.
독립 인도네시아 꿈꾼 한국인 영화 감독(4) 독립 인도네시아 꿈꾼 한국인 영화 감독자카르타 쁘땀부란 공동 묘지 내 허영 무덤을 찾아서 허영(許泳)은 「그대와 나(君と僕)」라는 일본군이 좋아하는 영화를 만든 실적으로 인도네시아 자바로 가게 되었다. 허영의 일본식 이름은 히나츠 에이타로(日夏英太郞), 인도네시아 이름은 휴영(Huyung)이다. 허영은 제16군 선전반의 일원으로 이곳에서 「Calling Australia」이라는 영화를 제작하는 등 일제의 전쟁 수행을 위해 일했다. 일제에 충성을 다하던 허영은 1945년 1월 고려독립청년당의 암바라와 의거에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해방 후 허영은 '재자바조선인민회'를 1945년 9월 1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조선인민회는 일본의 패전 시 자바에 남아있던 한국인 군속, 민간인 및 천여 명으로 규합하.. 2017. 9. 18.
독립 인도네시아 꿈꾼 한국인 영화 감독(3) 독립 인도네시아 꿈꾼 한국인 영화 감독자카르타 쁘땀부란 공동 묘지 내 허영 무덤을 찾아서 유명 관광지, 휴양지 보다는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현지의 모습을 기웃거리는 행복한 상상에 빠지려는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던 1940년대 초, 일본군이 점령했던 인도차이나 반도 등지로 반강제로 동원됐던 조선인 학도병과 포로감시원들의 사연이 떠오른 것입니다. 여건이 허락하는 대로 인도네시아에 남아 있는 이들의 발자취를 쫓아보기로 결심하고 여기저기 자료를 뒤졌습니다. 그러던 중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서 인도네시아 내 유적지와 관련된 정보를 접했는데, 허영의 묘지가 가장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홈페이지에 소개된 허영에 대한 자료는 아래와 같습니다. 2017. 9. 17.